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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

나에 대한 글

 한 부모님 밑에서 1남4녀 중 차녀로 태어나 순진만만 하고 고집쎈 아이로 성장 했다. 내 고향은 경기도 인천 짠돌이 동네에서 세상 모르고 자랐다. 어릴적 기억은 초등 학교 때 남은 사진 한장 뿐이였다. 초등학교때에는 공부 밖에는 몰랐는데 사춘기였던 고등학교 시절은 엉망이었다. 내 멋대로 살아온 추억들이 아직까지도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남들도 사춘기 격고 왔둣이 나도 좋은 추억은 못 된다. 말썽 꾸러기 여고생 시절은 기억 하고 싶지 않다. 허지만 전자 노트에 적고 나면 그 기억들은 사라지겠지... 초등학교때는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 들어 가면서 부터 땡땡이도 치고 야단도 맞구 공부는 커녕 친구랑 놀러 다녔다. 성적은 항상 꼴지였다. 이 글 쓰는 조차도 챙피하다. 우리집 형제 중에서도 오직 나만 엄마한테 속썩혀 드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땐 난 부모님의 정이 그리웠기 때문에 사춘기 시절은 망나니로 커던 것 같다. 지금은 애엄마가 되고 중년이 되고 부모님 마음 알것 같기도 하구 한편으로는 아직도 모르겠다. 친정 부모님을 뵐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죄송스럽구 마음만 아프다. 저희 아빠는 미국 해군이셨다. 어릴적에 가끔 한국에 나오셔서 우리들을 초코렛으로 달래 주곤 하셨다. 그때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지 못 했을까 후회가 된다. 세월이 흘러 흘러서 고교 졸업을 마치고 곧 바로 이민을 갔다. 도착한 곳은 "괌"이란 섬 마을이다. 집 보다 가까운 바닷가에서 살았다. 미국 땅에 밟아 본 소감은 뭐라고 할까 '멍' 하다 표현 하고 싶다. 그후 일년 반동안이었지만 추억거리은 없었던 것 같다. 또 어디론가 이사을 해야만 했다. 사촌 언니가 살고 있는 이곳 엘에이다. 이곳 엘에이에서 사는 사람은 거의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미국인이였다. 이런 잡종 동네에서 일이년 넘게 살아 왔던 것이다. 사촌언니는 유학생 비자로 결혼 생활을 어렵게 살아 왔다고 한다. 한가지 웃낀것은 사촌언니 아파트에서 방 한칸에 열식구가 빽빽한 공간에서 의식주을 해결 했었다니,,, 지금에서야 생각 해 보니 웃음만 나온다. 부모님은 걱정 스러웠던지 미국 음식점 햄버거 식당을 시작 했다... 대식구 있을곳을 마련 하셨다. 차로 30분거리인 커다란 하우스 방4개에 차 창고이며 부엌 이며 난 마음에 들엇던지 얼른 방 차지 하고 있었지만 대식구라서 방 하나에 두명씩 의식주 생활 왔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생활은 반복에 반복을 이어 가면서 어리고 어린 우리들은 부모님을 도와 드릴 수 밖에 없었다. 동생들은 엘에이 대학에 입학을 하고 언니랑 정신이 없이 일만 했다. 2년동안 손님이 줄어 들자 다른 식당으로 옮겼다. 집에 가까운곳 이테리 식당으로 간것이다. 그러는 동안 사촌언니는 타주로 이사을 갔다. 누구 보다도 난 열심히 일 하며 살아 왔다. 동생들은 짬내서 도와주곤 했다. 일년이 못가서 불경기이다 한인타운 폭동이다 떠들석 했었다... 언니는 시집 갈 나이 될 무렵 부모님 다니는 교회에서 소개한 형부을 만나서 시집을 갔다. 그후 난 일을 하면서 방황 했다. 좀 답답하고 누군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때 한국 친구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 나가야지 벼루고 있었는데 때 마침 부모님이 한국에 나갔다 오라고 허락 하셨다. 식당 일은 부모님한테 맡겨 두고 고교 동창생들 만나러 신나게 놀던 중 나에게 중매가 들어 온것이 그때 사촌 오빠 소개로 만난 사람이 지금 애아빠다. 그러니까 친정엄마의 친척식구 중, 누구의 누구의 또 누구인 족보인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동안 살아온 봐로는 속아서 살아 왔던것이다. 남들이 하던 말이 생각 난다. " 내 눈에는 콩각시가 씌어는지 저런 남자 하고 만났을까" 하고 얘기들이 많다. 그래서 이혼률이 절반 가량이 넘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맺어 준 인연인데 백년회로 해야지 당연하게 생각 한다. 난 영주권으로 만났기 때문에 결혼은 미국법에 걸처서 어렵게 만나 지금까지 살아 오게 된것이다. 난 첫 신혼 꿈이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아이을 낳고 살다 보니 내 꿈은 어느덧 사라 지고 부엌 아줌마가 된것이다. 남남이 만나 다른 성격으로 서로 맞쳐 살려니까 무지 힘들었다. 그러던 중 둘째아이를 낙태을 시켰다. 그후 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첫아이가 미성장애로 낳은 탓에 둘째아이는 볼수 없던 것이다. 그것 인하여 난 마음에 문을 닫기로 결심을 했다. 매일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그러다가 목숨까지도 버렸다. 질긴 인연은 어디서나 살아 돌아 온다고 누가 말을 했던가... 하나님이 한번 기회을 준것이다. 그후 별거 하면서 생각 해 보기로 했다. 난 아이와 살기가 막막 했다 허지만 친정 부모님이 많이 도와 주셨고 주위 사람들도 날 도와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다니면서 갑자기 질병이 생겨 결국은 살림을 합치고 말았다. 일은 일대로 몸은 몸대로 스트레스에 지쳐 큰일이 난것이다. 나에게 외로움이 찿아 와 못 할짖을 하고만 것이 두번째 고비였다. 세번째 고비는 남편이 초기 내장암에 걸리고 말았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변주머니을 차고 다니는 것이 괴로울 뿐이라고 말 한다. 열심히 커가는 아이을 보면서 애아빠가 페인트 비지니스을 시작 하게 되었다. 별거 하기 전에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 문제 때문에 시달리다가 학교을 그만 두었다. 지금은 집에서 마음에 준비을 하고 있다. 어디서 내 인생이 꼬인 것일까.. 부모을 잘 못 만나서 아이 인생길까지도 막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큰벌 내리시는 건지도 모른다. 난 그 큰죄을 교회에 나가 속죄를 기도로 답한다. 천국에 먼저 간 친구들도 날 지켜 보겠지... 미안함이 든다. 왜냐 하면 혼자서 마지막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적고 나니 친구들이 무척 그립고 보고 싶다. 친구들아 ~ 그곳에 잘 있는지 왜 죽음의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불치병에 못 이겨 저 세상에 갔다고 소식 듣었을땐 마음 아파 울기만 했다. 곧 하나님이 오신다고 떠들석 했지만 그 일을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이 없어지는 날까지 남편과 마지막 인생을 회게하며 살것이다. 남편의 짧은 인생길 이제부터라도 잘 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앞선다. "있을때 잘 해 후회 하지 말고" 노래 가사가 있둣이... 열심히 노력 하며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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